REVIEW 영화의전당 개관 축하공연

2011 제3회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 The Classic 아시아의 창(窓) 부산-

 

 

‘음악의 도시 부산’을 꿈꾸게 한 무대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KBS 클래식FM ‘FM음반가이드’ 진행)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루체른. 아름다운 호수에는 백조들이 유유히 떠있고 리기산을 비롯한 알프스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구시가에는 유구한 역사의 분수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건물들이 많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나그네들의 발걸음을 잡아끈다. 그러나 지금 루체른을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는 힘은 클래식 음악에서 나온다. 해마다 펼쳐지는 루체른 페스티벌에 가면 음반점에 들른 구스타보 두다멜을 볼 수 있고 사이먼 래틀이 산책하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끄는 세계 최고의 올스타 오케스트라인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음악애호가들을 매혹시키는 주된 요인이다. 카라얀에 이어 베를린 필의 수장이었던 아바도가 위암 수술을 마치고 건강을 회복한 뒤 직접 만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 빈 필, 런던 심포니 등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수석 주자들이 모인 ‘꿈의 올스타 악단’이다. 루체른 문화 컨벤션 센터(KKL)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공연은 그대로 CD로 제작돼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발매되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다.

 

 

부산은 이렇게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루체른과는 대조적인 도시다. 호수 대신 아름다운 바다가 있고, 거대한 광안대교와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부산은 ‘스케일’을 자랑하는 도시다. 그리고 부산에는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 오충근이 예술감독으로 이끄는 부산월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유럽과 미국, 러시아 등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부산 경남 출신의 연주자들과 국내의 뛰어난 아티스트들로 구성한 오케스트라다. 지난 2009년 창단 연주회를 가졌고 2010년 공연에 이어 올해 10월 세 번째 연주회가 펼쳐졌다.

 

 

이번 무대는 PIFF에서 BIFF로 이니셜이 바뀌며 새로 태어난 부산국제영화제를 기념하는 의미를 새기면서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인 ‘영화의전당’ 개관 기념으로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국내 야외 공연장으로서는 드물게 지붕이 설치돼 있어 우천시에도 전천후 야외공연이 가능하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지붕에 설치된 조명은 어둠이 깔리자 더욱 은은한 분위기를 내 주었다.

 

 

지난 10월 8일 오후 6시, 쌀쌀해진 날씨에도 4500여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으로 막이 올랐다. 오충근이 이끈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차분하게 시작해서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러시아군의 승리, 그 환희를 향해 치달으면서도 장엄함을 잃지 않았다. 객석 뒤 좌우에 큰 북을 치는 고수를 배치해 대포소리 부분에서 그에 버금가는 효과를 의도한 점도 참신했다.

 

이어서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이 등장해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했다. 집시의 정열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강조하듯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김지연은 줄리어드에서 명 스승 도로시 딜레이를 사사한 아티스트답게 능란한 기교로 고조되는 곡의 분위기를 리드했다.

 

소프라노 박정원과 테너 전병호는 크리스틴과 팬텀으로 분해 웨버 ‘오페라의 유령’ 중 ‘The Phantom of the Opera'를 불렀다. 팬텀의 내레이션과 더불어 후반부 크리스틴의 고음이 고조되는 부분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10명의 테너로 구성된 텐테너스는 문지은이 편곡한 ‘시네마 천국’ 등 영화음악 모음곡을 열창했고, 소프라노 박정원이 가세해 함께 번스타인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Tonight’을 부르며 어우러지는 목소리의 다정한 느낌을 부각시켰다.

 

부산의 전통예술단체 버슴새예술단의 사물놀이와 오케스트라가 함께한 박범훈의 ‘사물놀이를 위한 신모듬’ 중 ‘놀이’는 사물놀이 협주곡이었다. 사물놀이를 감싸 안는 듯한 오충근의 지휘가 돋보인 이 곡은 동양과 서양의 화합, 우리의 에너지와 질서의 조화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카덴차 격이었던 사물놀이만의 연주는 집중력이 배가되어 신명났다.

 

반젤리스의 ‘1492년 콜럼버스’ OST 중 ‘Conquest of Paradise'의 묵직한 허밍이 울리면서 순례자들처럼 양옆에서 합창단원들이 입장했다. 250여명의 합창단원들은 이어진 주말의 명화 시그널로 익숙한 ’영광의 탈출‘에서도 멋진 합창을 선보였다. 워낙 큰 무대였기 때문에 지휘자 오충근의 지휘를 보고 합창단 앞에 서있던 합창지휘자들이 전달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김지연이 다시 한 번 등장했다. 이번에 그녀는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롤프 러블랜드와 피오눌라 세리로 구성된 북유럽 듀오 시크릿 가든의 ‘Song’을 연주했는데, 한을 품은 듯한 음색으로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자아냈다. 애수 띤 선율은 스비리토프의 ‘올드 로망스’로 이어졌고, 이 곡이 끝난 뒤에 김지연과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깜짝 앙코르로 드라마 ‘하얀거탑’ 주제가를 연주했다. 전개가 급박하면서 어딘지 피아졸라의 탱고를 연상시키는 의외의 앙코르는 많은 청중들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텐테너스가 나폴리 민요 등 칸초네 모음곡과 푸치니 ‘투란도트’ 중 대표적인 테너 아리아인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뒤 마지막 곡인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이 울려 퍼졌다. 애국가 부분 이후 지붕 때문에 완전히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화려한 불꽃들이 수를 놓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앙코르로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중 ‘오 운명의 여신이여’를 불렀는데 이 또한 불꽃과 어우러지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야외무대에서의 공연은 전용 홀에서 연주하는 것에 비해 여러 가지 돌발 변수가 늘 존재한다. 바람 소리가 들어가고 마이크가 넘어지기도 한다. 만전을 기하더라도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이번 공연은 물 흐르듯 펼쳐져 진행 면에서 안정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 공연의 중심에는 예술감독인 지휘자 오충근이 있었다. 그를 상징하는 문구인 ‘온화한 카리스마’가 이제는 익숙하게 다가온다. 점차 부산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 오충근은 안으로는 단원들을 모으고 앙상블을 다지면서 밖으로는 후원을 위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21세기 지휘자의 할일을 조용히 실천하고 있었다. 주최측인 부산광역시와 KNN을 비롯해 프로그램 책자에 나와 있는 많은 후원기업들을 보면서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보았다. 루체른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로 기억되는 것처럼, 부산도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도시’에 이어 ‘음악의 도시’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쥘 부산의 가까운 미래 모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