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제4회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 The Classic 아시아의 창(窓) 부산 

예술 도시로 향하는 부산의 거대한 하모니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바람을 맞으며 광안대교를 지나면 바다 위를 나는 기분이다. 고층 빌딩과 마천루는 미래 도시의 풍광이다. 밤에는 홍콩의 야경이 부럽지 않다. 세계 최대 백화점이 있는 센텀 시티에 위치한 영화의 전당, 위용이 대단하다. ‘부산은 스케일’이라는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부산은 ‘제2의 도시’이면서 서울을 능가하는 스케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예술도 그러할까. 성수기인 가을 시즌을 맞아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공연장들에는 날마다 클래식 음악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인접한 성남시와 고양시는 서울의 인프라를 그대로 적용하며 저변을 넓히는 데 일조하고 있다. 브런치 콘서트와 렉처 콘서트 등 다양한 공연의 형태가 출현하며, 애호가들은 골라서 공연들을 소비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공연예술의 서울 집중 현상은 심각하다. 1위와 그 이하의 격차가 줄어들기 힘들어 보인다. 제2의 도시 부산은 명실공히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2위 자리 수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모방에 그쳐서는 발전할 수 없다. 서울에 세웠던 명연주단체를 똑같이 데려온다고 해서 지역의 예술계가 얼마나 업그레이드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지역의 색채를 유지하면서 그 위에 개성 있는 발전을 도모하고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존재는 고무적이다. 부산 경남 출신의 연주자들이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다가 뭉치는 축제관현악단이며 홈커밍 오케스트라이다. 사람이 지닌 고향으로 회귀하는 본능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다. 오케스트라에 라포(rapport)가 형성되면 그 표현에 있어 아름다움과 힘을 갖게 된다.
2009년 출범한 부산월드필하모닉의 네 번째 공연이 지난 10월 6일 토요일밤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펼쳐졌다. 영화의전당은 인파로 가득 찼다. 야외 공연은 콘서트홀에서와 온도차가 있었다. 초청 인사들과 시민들은 모두 축제에 참여하는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악장을 맡은 지성호 울산시향 악장을 비롯해 부산월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박수를 받으며 부산월드필하모닉의 예술감독인 지휘자 오충근이 등장했다. 첫곡은 차이콥스키 ‘이탈리아 기상곡’. 금관악기들이 호쾌하게 포효하더니 러시아의 광야에 어둑하게 내리는 땅거미처럼 진중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이내 발랄해지더니 오충근의 지휘봉이 빨라졌다. 성큼 성큼 육중한 걸음으로 질주했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나오자 청중들의 환호성이 더 커졌다. 객석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앙상블 디토를 이끄는 리처드 용재 오닐은 젊은 클래식 연주가의 상징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전날 모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 인지도가 많이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원래 협연이 예정됐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가 갑작스런 부상으로 참석 못하게 돼 걱정이 됐었다. 하지만 리처드 용재 오닐은 그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웠을 뿐만 아니라 호응과 몰입도 또한 높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비올라로 연주한 첼로곡,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신의 날)’는 담담하고도 애절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부산대 음대 교수로 재직중인 소프라노 박은주는 번스타인 ‘캔디드’ 중에서 ‘화려하고 쾌활하게’를 노래하면서 고음 처리가 능숙한 콜로라투라 창법을 자신감 있게 선보였다.
이제 연합합창단의 차례였다. 반젤리스의 ‘1492 콜럼버스’ 중 ‘낙원의 정복’이 합창단의 저음을 바탕으로 한 반복적인 악구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합창단원들이 양쪽에서 횃불을 든 채로 두 갈래로 무대까지 걸어나오는 연출이었다. 반젤리스의 이 곡은 야외공연에서 즐겨 시도되곤 하는데, 대규모의 인원이 동선을 따라 이동해야 하기에 보기보다 쉽지 않다. 별 탈 없이 무사히 안착한 것은 그만큼 준비가 잘 됐다는 얘기다.
합창단은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과 ‘아이다’ 중 ‘개선 행진곡’ 등 베르디의 두 작품을 웅장한 합창으로 노래하면서 내년 맞이하는 거장의 탄생 200주년을 미리 기념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다시 나와 이흥렬의 ‘섬집아기’를 연주했다. 커다란 무대에 홀로 선 그의 연주는 감동적인 동시에 여백의 미를 느끼게 했다. 그 여운이 남아서인지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중에서 왈츠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프라노 박은주가 다시 등장해 아르디티의 ‘입맞춤’을 연주했다. 박은주는 마치 ‘술래, 술래 잡자’로 들리는 것같은 유려한 딕션과 우아한 선율선을 확실한 고음으로 잘 살려냈다.
다음은 오케스트라만의 순서였다. 오충근은 격정적인 지휘로 스트라빈스키 ‘불새’ 중에서 ‘카쉬체이 왕의 죽음의 춤’을 이끌었다. 금관악기가 포효하고 타악기가 폭발하는 음악의 전장을 방불케 했다. 부산월드필하모닉이 그려내는 불새는 거대했다.
신고전주의 관현악의 진수를 맛본 이후 팝페라 가수 비뮤티(홍범석)의 무대는 대중적이고 친근한 영화음악과 뮤지컬 넘버 등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끝곡 두 곡은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세계를 생각하는 시간을 선사했다. 박범훈의 ‘사물놀이를 위한 협주곡 ’신모듬‘ 중 ’놀이‘는 사물놀이 공동체인 ’버슴새‘와 함께했다. 오케스트라와 사물놀이가 따로 또 같이 서로 노니는 모습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거대한 크로스오버를 연상시켰다. 우리 꽹가리는 서구 오케스트라의 짜여진 형식을 조금씩 두드리며 변형시켰고, 오케스트라는 꽹가리와 장구, 북과 징에 색채를 입혀 주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한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은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던 안익태 선생을 축으로 서구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우리 애국가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눈앞에 드러냈다.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함께한 애국가 부분은 장관이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벅차오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오충근은 앙코르로 역시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 중 ‘오 운명의 여신이여’를 연주했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색종이 대포가 발사되며 하늘을 가득 덮었다.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충근의 지휘봉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무리 없는 중용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그는 큰 무대에 강한 지휘자다.
또 곡목이 무척 많은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모두 연주된 느낌이었다. 야외 공연의 특성을 잘 살린 프로그램으로 시각적인 흥미도 상당했다. 점점 업그레이드되는 부산월드필하모닉의 위상을 확인한 무대였다.
문화예술은 당장의 효과는 없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이미지 제고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의 대상이란 사실을 KNN방송국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투자자의 인내를 시험하는 지난한 분야이기도 하다. 아무나 문화예술의 과실을 따지 못한다. 꾸준히 했을 때에만 거둘 수 있다. 출범 때부터 부산월드필하모닉을 아낌없이 후원해 온 부산광역시와 KNN의 파트너십은 부산을 서울에 버금가는 문화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