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2013 제5회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The Classic - ‘아시아의 창(窓) 부산’

 

무더위 잊게 한 여름의 장관

글 류태형(음악칼럼니스트, 전 ‘객석’ 편집장)

 

2013년의 여름은 유난히 길고 더웠다. 서울은 물론 동부와 남부지방을 비롯해 전국을 유례없는 찜통으로 만들었다. 장마가 끝난 뒤 내리는 비조차 무더위를 가시게 하지 못했다. 30도가 넘는 낮 기온은 밤에도 떨어지지 않아 열대야를 이루었다. 불쾌지수는 높아지고 사람들은 그늘보다도 에어컨 있는 곳으로 피신하다시피 했다. 전력 수요는 연일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러던 8월 6일 저녁 8시 부산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열린 제5회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아시아의 창(窓) 부산’ 공연을 보면서 나는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가장 커다란 지붕을 가진 탁 트인 장소에서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시원한 연주는 가슴 속에 앙금처럼 남았던 여러 편린들을 단 한 번에 훑고 지나갔다. 여름의 야외 음악회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게다가 부산에서 부산과 경남지역에 대한 애향심이 우러나는 단원들과 세계적인 수준의 협연자들이 이루어내는 케미스트리는 각별한 감동을 자아냈다.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자리하고 오충근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이 등장했다. 첫 곡은 차이콥스키의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열병을 앓는 듯한 도입부에서 격렬한 싸움의 선율, 달밤의 애틋한 연인 같은 정서가 거대한 무대 위에 펼쳐졌다. 육중한 관현악과 팀파니의 연타, 심벌즈의 파열음이 속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 비교적 긴 곡이었지만 음악이 밟는 드라마틱한 무보(舞譜)를 좇는 청중들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25세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사라사테 ‘카르멘 환상곡’에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2010년 일본 센다이 국제콩쿠르 입상을 시작으로 피가니니 국제바이올린콩쿠르 1위없는 2위에 오른 김다미는 2011 일본 나고야 무네츠쿠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2012년 하노버에서 열린 요제프 요아힘 국제 콩쿠르에서도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과 뉴잉글랜드 음악원 학사·석사과정을 전액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전문연주자 과정을 아론 로잔드, 미리암 프리드에게 배웠다.

KBS 클래식 오디세이 프로그램과 금호아트홀 독주회에서 그녀의 연주를 접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던 차에 부산에서 다시 본 김다미가 반가웠다.

외국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부산 첫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이날도 그녀의 개성은 빛났다. 김다미는 활에 힘을 가해 긋는다기보다 활 위로 살짝 띄우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귀가 피로하지 않은, 독특한 미감을 들려주는 연주였다. 빠른 패시지에서도 여유를 가지고 나긋나긋하게 휘어지는 유연성은 앞으로 그녀가 대가로 성장할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어서 부산시립합창단과 김해시립합창단, 수영구소년소녀합창단이 무대 좌우에 넓게 포진하고 테너 전병호와 소프라노 강민성, 바리톤 한규원이 등장했다.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의 명작 뮤지컬 ‘레미제라블’ 하이라이트. 'Prologue ‘I Dreamed a Dream' ’Bring Him Home' 등 귀에 익은 선율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특히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김하은 어린이의 ‘Castle on a Cloud'는 청아한 가창으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성악진과 합창단이 도열한 채 국립 부산국악원 사물놀이팀이 등장해서 이태현이 편곡한 ‘아리랑 환타지’를 연주했다. 중간에 사물놀이 솔로 부분이 있었는데, 사물놀이팀은 마치 협주곡의 카덴차처럼 국악과 양악이 신명나게 어우러지는 모습은 더욱 다채롭게 다가오면서 청중들의 흥을 돋웠다.

이어진 영화음악 메들리는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청중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 그 장면 장면이 대형 스크린에 비춰지며 추억을 소환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이번에는 은색 드레스를 입고 나와 문지은이 편곡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시네마 천국’ 중 ‘사랑의 테마’를 연주했다. 가녀리지만 뚜렷하게 휘어지는 김다미의 바이올린이 영상과 어우러져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순간을 연출했다. 다음은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리스트’였다. 존 윌리엄스가 음악을 쓰고 이차크 펄만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슬프디 슬픈 테마 음악이 김다미와 부산월드필하모닉의 연주로 흘렀다. 스크린에는 역시 흑백으로 처리된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흐르며 음악과 영상이 얼마나 강렬하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오충근은 힘차게 지휘봉을 흔들며 이동준의 ‘태극기 휘날리며’ 중 ‘에필로그를 연주했다. 영화음악 끝곡은 존 윌리엄스의 ’스타 워즈‘였다. 원곡에서 런던 심포니가 담당했던 이 작품을어두운 밤 야외에서 대형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눈앞에서 감상하니 색다른 생동감이 느껴졌다.

다시 합창단이 나오고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을 지휘했다. 오충근은 절도 있는 지휘로 작품 자체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방사시키며 이국적인 색채감을 표출시켰다.

공중에 쏘아 올려진 하얀 색종이들이 나부끼는 피날레를 보면서 5회째를 맞은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위상이 궤도에 오르고 점점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올해에는 젊은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양경아로 대표되는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부산월드필하모닉의 태도와 자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본다.

대규모 야외음악회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해마다 지속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오충근 예술감독과 주최 측인 KNN, 부산광역시의 후원, 그리고 여러 협찬사들이 힘을 모았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정통 클래식과 실험적인 퓨전, 대중적인 영화음악 등 프로그램을 안배한 점도 돋보였다. 올해에는 축제의 시기도 좋았다고 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부산을 찾는 8월, 부산바다축제 기간에 음악회가 마련돼 뜨거워진 축제 분위기 속에서 개최됐다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휴가철이라 청중 가운데는 부산 외에 각 지역에서 온 피서객들도 많았다. 그들은 점점 달라지는 부산의 문화적인 수준을 피부에 느끼면서 각자의 도시로 돌아갔을 것이다. 앞으로 오페라하우스가 건립되고 더욱 수준 높은 공연들이 부산을 수놓았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부산은 바다와 낭만, 예술의 도시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