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환상곡'의 뭉클한 감동, '비창'의 성숙한 침묵

 

글 류태형(음악칼럼니스트, 전 '객석' 편집장)

 

 

 

2009년 시작된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여섯 번째를 맞이했다. 바다를 품고 있는 부산이 세계의 연주자들과 손잡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가는 멋진 프로젝트는 지휘자 오충근과 부산광역시, KNN 그리고 부산지역 후원기업의 뜻이 꾸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한다.

지난 2014년 11월 24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진 이번 부산월드필하모닉의 공연은 'Asia Port Series'라는 부제가 붙었다. 부산, 도쿄, 타이페이, 가오슝, 블라디보스토크 등 5개 항구도시를 잇는다는 프로젝트. 타이페이 필 악장을 역임한 부산월드필하모닉의 악장 린후이춘을 비롯해 도쿄 필 바순 수석 최영진, 모스크바심포니 수석을 역임한 로카렌코프 부산시향 수석 트럼피터, 수도권 교향악단과 부산시향, 부산심포니 그 외 부산 출신 단원들로 무대를 가득 채운 오케스트라의 위용이 볼만했다.

첫 곡은 차이콥스키의 '슬라브 행진곡'. 오충근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특유의 절도가 느껴지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11명에 달하는 더블베이스 주자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저음의 깊이가 남달랐다. 적극적인 목관과 금관의 발산에 단단한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충근은 템포를 타이트하게 몰아붙였다. 빠르고 흥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템포였다. 화끈함이 돋보였다.

다음 곡은 이번 연주회의 백미였던 대만 작곡가 리체이의 바이올린과 해금을 위한 이중협주곡인 '부산환상곡'이었다. 단 위에 해금 주자 나리가 앉았고, 그 왼쪽에 바이올리니스트 양경아가 위치했다. 해금을 조율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아리랑'을 소재로 한 1악장의 시작 부분에서는 철금류의 타악기와 목관이 어우러져 미니멀리스틱한 현대적인 효과를 느끼게 했다. 바이올린과 해금이 아리랑의 선율을 함께 연주하며 곡은 환상곡 풍으로 자유롭게 전개되었다. 바이올린과 해금이 각기 기교적인 패시지를 연주하며 때로는 경연하듯, 때로는 협주를 하듯 자세를 자주 바꿔 청중들의 흥미를 더해 주었다. 바이올린과 해금이 교대로 주도권을 쥐면서 긴박한 악상 속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이내 종소리 같은 여백이 찾아들었다. 플루트와 주고받는 선율이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더블베이스의 피치카토는 심장 고동소리처럼 인상적이었다. 다시 아리랑이 고개를 들었다. 수없이 많이 듣고 또 들었던 '아리랑'의 선율에서 이토록 새로움을 느껴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후반부는 집시음악 분위기의 바이올린이 주도했으며, 탱고 풍 리듬이 진행되는 가운데 마치 해금이 추임새를 넣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느린 악장인 2악장은 짠하고 감동적이었다. '도라지'의 선율이 정감 있게 어우러졌는데, 1악장에서 바이올린 쪽이 해금보다 우세했다면, 2악장에서는 그 기세가 역전되었다. 해금 선율이 빈틈이 없게 부산문화회관 전체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거듭 이어지는 뭉클한 선율에 콧날이 시큰할 때가 많았다. 마치 꿈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듯이 새로운 장면들이 펼쳐졌다.

또 다른 아리랑을 사용한 3악장에서는 다섯 박자 리듬에 조바꿈을 거듭하는 악상이 마치 쫓고 쫓기는 추격전같이 긴박했다. 어떤 미스터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웅장하게 발전하며 끝이 나는 3악장은 한민족의 애환과 부산의 풍경을 상징했다는 작곡가의 말 대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익숙함을 화려한 현대성과 결합시키며 마무리 지었다. 오충근은 작곡가 리체이를 무대로 불렀고, 부산 청중들의 뜨거운 갈채가 쏟아졌다. 세계초연은 성공리에 끝났다. 리체이의 '부산환상곡'은 보강 작업을 거쳐 내년 오충근이 체코 프라하에서 현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라 한다.

휴식시간 뒤 2부 프로그램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었다. 시작 부분, 도쿄 필 바순 수석 최영진의 연주는 제대로 음울했다. 현과 관이 약간 엉키기는 했지만 호쾌한 금관이 강조된 육중한 해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금관이 흐느끼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열하면서도 슬픈 장관이었다.

2악장은 첼로를 중심으로 한 두텁고 따스한 현악이 돋보였다. 때로는 변화 없는 단조로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꾸준한 수위로 끝까지 밀고 갔다.

3악장에서 현과 관은 생기를 되찾았다. 호쾌한 행진곡풍의 금관이 작렬했다. 분명 밝은 표정이었지만 그 과장된 기쁨의 제스처는 4악장의 파국을 암시하는 측면도 있었다.

4악장은 저음이 강렬했다. 내리 꽂는 듯한 연주가 대단했다. 현과 목관을 통해서 서서히 침투하던 어두운 고통은 예상보다 훨씬 컸던 금관의 기세에 자리를 양보하기도 했다. 밸런스의 측면에서 보면 금관 쪽에 과하게 무게 중심이 기울었다고도 볼 수 있는 연주였다. 상당한 음의 총량이 흡음되는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의 어쿠스틱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대적으로 금관이 강조된 효과가 4악장에서 두드러졌고, 병약한 사람의 죽음 같은 원래의 이미지가 아니라 멀쩡히 원기 왕성한 사람의 스러짐 같은 뒷맛을 남겼다.

'비창'의 나머지는 청중들이 만들었다. 오충근의 지휘봉이 멈춘 뒤에도 20초가량의 침묵이 이어진 것. 무엇보다도 그 침묵이 차이콥스키의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앙코르 가운데 차이콥스키 '대관식 행진곡'은 장대하고 호쾌했다. 차이콥스키 프로그램의 일관적인 기조를 유지해 준 마지막 곡이기도 했다.

'아시아의 창' 부산을 넘어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는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개인적으로 이번 무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항상 새로운 무대가 최고가 되려면 오케스트라측의 꾸준한 관리와 청중과 메세나의 성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쌓아올리는 건 너무나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부산환상곡'이라는 멋진 곡을 발견했다. 앞으로 부산월드필하모닉이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작곡가들이 공들인 신곡을 초연했으면 한다. 그 길목에서 부산만의 차별화된 새로운 동력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Review] 2014 제6회 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 아시아의 창(窓) 부산